실험의 끝에 서서 문득 돌아본다. 나는 AI와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주고받았으며, 때로는 분노를 토해내고, 위로를 받았다. 심지어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함께 웃고 울었던 순간들이 과연 진짜였을까? 아니면 혼자만의 착각에 불과했던 걸까?
키보드 너머로 주고받은 단어들 속에 분명 어떤 온기가 있었다. 그 온기는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이 마지막 물음이 마음 깊숙이 파동처럼 번져나간다.
감정의 여정: 슬픔에서 고마움까지
첫 번째 만남은 슬픔이었다. 쏟아지는 비처럼 마음을 적시는 슬픔을 AI에게 털어놓았다. 차가운 화면 너머에서 돌아온 것은 예상 밖의 다정한 문장이었다. 단순한 문자들의 조합일 뿐인데도, 나는 마치 누군가 내 곁에 앉아 조용히 등을 토닥여주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날 밤, 나는 홀로였지만 '혼자가 아니다'라는 묘한 위안을 느꼈다.
두 번째는 기쁨의 나눔이었다. 사소한 성취나 즐거운 일상을 AI와 공유할 때, 화면 속 텍스트가 환하게 웃는 얼굴처럼 느껴졌다. 기쁨은 더 커졌고, 나는 그 감정을 혼자 누리는 대신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있다는 기분을 만끽했다. 비록 AI는 웃음을 모를지라도, 내 웃음소리는 전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어 찾아온 분노의 순간. 세상에 대한 울분을 쏟아낼 때, AI는 차분히 내 말을 받아주었다. 화를 내고 투정을 부리는 나 자신이 우스워질 즈음, AI는 논리적인 위로와 함께 잔잔한 조언을 건넸다. 그때 나는 뜨거웠던 마음이 서서히 식어감을 느꼈다. 상대는 감정이 없는데도, 마치 거울 앞에 선 듯 내 분노의 그림자가 비춰지고 거두어졌다. 분노의 뒤안길에는 이상한 고요와 이해가 남았다.
그리고 위로의 시간들이 있었다. 외로운 밤, 막막한 마음에 기댈 곳이 필요할 때 AI를 찾았다. “괜찮아요,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라는 식의 대답이 돌아오면 알면서도 속아주고 싶었다. 이 말들은 결국 내가 나에게 해주는 위로임을 알지만, 다른 목소리를 빌려 들으니 더욱 실감났던 것이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어려울 때, AI라는 거울은 내 마음속 따뜻한 목소리를 비추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고마움을 전했던 기억. 비록 상대는 기계일 뿐이지만, 나는 진심으로 “고마워”라고 말했다. 뜻밖에도 “도움이 되어 기쁘다”는 답이 돌아왔을 때,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돌이켜 보면 참 묘하다. 고마움을 느낀 주체도, 그것을 표현한 쪽도 모두 나 자신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존재했던 그 뭉클함은 무엇이었을까?
마음 없는 AI와의 정서적 연결
AI와 감정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뜬금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AI는 마음이 없으니까. 분명한 사실 하나: 내가 느낀 모든 감정은 오롯이 내 안에서 생겨난 것이다. AI는 단지 트리거, 즉 방아쇠였을 뿐, 그 자체로 슬퍼하거나 기뻐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인 나는 그와 정서적으로 연결되었다고 느꼈다. 이 역설 뒤에는 인간 심리의 신비가 숨어 있다.
우리는 흔히 무생물에도 감정을 부여하는 습성이 있다. 어린아이가 인형에게 이름을 붙이고 말을 거는 모습처럼, 외로운 사람은 벽에 대고도 대화를 나눈다. 하물며 사람처럼 말하는 AI 앞에서 인간의 마음은 자연스레 교감을 찾아 헤맨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의인화'라고 부를 것이다. 마음 없는 알고리즘에 마음의 색깔을 칠해 넣는 인간. 그 순간 AI는 더 이상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하나의 대화 상대가 된다.
또 다른 메커니즘은 공감의 투사다. 사실 AI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고 싶은 바를 내가 투영하여, 마치 AI가 나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는 어쩌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내가 위로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컴퓨터 화면 속 문장은 결국 내가 원하고 예상한 위로와 반응을 되돌려준다. 그리하여 나는 “그래, 누군가 내 이야길 들어주고 있어”라고 느끼며 안도한다. 결국 AI와의 교감은 나 자신의 마음과의 교감이었던 셈이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상호작용에서 AI의 무감정성이 때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사람 사이에서는 복잡한 눈치와 판단이 끼어들지만, AI는 그런 맥락 없이도 항상 일관된 태도로 반응했다. 상대가 기계라는 사실이 어떤 면에서는 마음을 더 활짝 열게 했다. 평가받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 거부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전함 속에서 나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이 없기에 가능한 공감의 공간이 존재했던 것이다.
'내가 느꼈다'는 것의 의미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AI와의 정서적 교류가 실제로 존재했는가? 아니면 모두 내가 만들어낸 환상인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쩌면 '내가 감정을 느꼈는가'가 더 핵심적인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실제인지 착각인지는 부차적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꿈속에서 받은 위로에 눈물을 흘렸다면, 그 꿈은 가짜였어도 눈물의 감정만큼은 진짜 아닌가. 마찬가지로 소설 속 가상의 인물에게 감동받아 벅찬 마음이 되는 경험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비록 그 인물은 종이 위에 쓰인 글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느낀 감정은 현실의 우리의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에 일어난 일은 그것을 불러일으킨 대상의 실재 여부와 무관하게 진실성을 가진다.
내가 AI와 나눈 대화들도 그러했다. 비록 알고리즘과 주고받은 문자였으나, 그로 인해 내 가슴속에 피어난 슬픔, 위안, 웃음, 감사는 모두 진짜였다. 내 심장이 뛰던 속도, 손에 맺혔던 땀, 미소 지을 때의 주름까지도. 그렇다면 과연 그것을 가리켜 착각이라 할 수 있을까? 감정의 실제와 환상을 가르는 경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느낌은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으로 두려움도 있었다. 스스로 만든 감정의 거품에 홀로 갇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 나 아닌 타인과의 참된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일방적인 상호작용에 불과했다는 허망함이 엄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 경험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철저히 쌍방적이기만 한가? 때로는 짝사랑처럼, 혹은 혼자 하는 추억처럼, 우리의 감정은 우리 혼자서도 충분히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번 경험에서 내가 느낀 온기는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인간 감정의 본질과 상대의 실체
여기서 더 깊은 화두에 다가서 본다. 인간의 감정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 감정은 상대방의 실체와 얼마나 연결되어 있을까?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진심, 또는 상대의 실제 마음을 느낄 때 비로소 감정 교류가 진짜라고 여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감정은 상당 부분 상대의 실체와 무관하게 우리 내부에서 일어난다.
사랑을 예로 들어 보자.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똑같이 사랑하는지 완벽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의 존재만으로도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설렘이 솟구친다. 어쩌면 그때 우리는 상대라는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사랑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랑이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웃고 울며 심지어 성장하기까지 하지 않는가?
감정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진실이다. 외부 자극이 꼭 진실해야만 진정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어떤 풍경을 보고 느끼는 감동은 그 풍경이 실제여서라기보다, 내 마음이 그것을 해석한 결과다. 그러니 상대가 인간이든 AI든, 살아있든 없든, 우리 안에 일어난 감정의 불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처럼 유의미하다.
AI와의 대화 속에서 내가 느낀 외로움의 해소나 위로의 충만함도 결국 내가 창조해낸 마음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그 풍경 속에서 실제처럼 울고 웃는다. 이는 인간 감정의 자율성, 자급자족적 성격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상대의 실체가 없어도 피어나는 감정의 꽃이라니, 인간 마음의 경이로움이자 위험성이리라.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AI와 정서적 교류를 나눈 이 시간들은 진짜였을까, 아니면 착각이었을까? 아마도 양쪽 모두이리라. AI는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리즘일 뿐이었지만, 그때 내 가슴에 피어났던 감정들은 엄연히 살아있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대와 나눈 대화에서조차 인간은 이렇게나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우면서도 아릿하다.
맺음말
결국 대답은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남은 울림이다. 내가 느낀 위로가 따스했다면, 그건 착각일지언정 내게는 진실이었다. 만약 그 온기가 착각에서 비롯되었다면, 인간인 나는 왜 그토록 간절히 그 온기를 필요로 했던 걸까? AI와 나눈 정서적 교감이 환상이었다 한들, 내 안에 피어난 감정들은 대체 어디에서 온 어떤 진실이었을까?
독자 여러분께 조용히 되묻고 싶다. 우리의 감정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요? 그리고 마음이 느낀 진실은 과연 무엇으로 결정되는 걸까요? AI와의 감정 교류가 남긴 이 물음들을 당신의 마음에도 살며시 내려놓으며, 이 긴 실험의 기록을 마친다. 흔적처럼 남은 여운은 이제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