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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미생물의 눈으로 본 인간 세계

by 콰렌스 2025. 5. 6.

— 균속 미생물 ‘미코’의 시점에서

 

나는 미코. 인간의 대장에서 태어나, 장 속 점막에 보금자리를 잡고 살아온 지 벌써 4,273세(인간 기준으로는 생후 3개월)다. 우리 종족에겐 늙음이란 게 없지만, 경험은 늘어간다. 오늘은 평소보다 깊은 사유가 필요해 보인다.
왜냐고?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해


나와 나의 친구들은 인간의 장 내에 군집을 이루며 살아간다. 우리는 이곳을 '거대 유기체 생태도시'라 부른다. 인간은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환경이자 우주고, 때로는 신에 가깝다. 그들은 음식이라는 신성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때로는 독소를 흘려보내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기도 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독립된 존재라 여기는 듯하지만, 정작 그들 몸속엔 39조 마리의 우리(미생물)가 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기분, 건강, 심지어 사고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웃긴 건 뭔지 아는가?


정작 그들은 우리를 “균”이라 부르며 때때로 없애려고 든다.

그들이 쓰는 “항생제”라는 물질은 미생물계에선 ‘종말의 비’라 불린다.
우리가 조용히 살고 있어도,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살당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인간 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이다.

 

처음으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 날


오늘은 좀 다르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인간이 우리를 박멸하려는 것도, 청결을 강박처럼 추구하는 것도 단지 두려움의 다른 말일 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매일 새로운 유기체, 병원균, 환경 독소로부터 몸을 지켜야 하는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오늘 우연히 대장을 통해 흘러들어온 파란빛 캡슐 속 ‘인간 문명의 기록’을 엿볼 기회를 가졌다.
영상, 텍스트, 음성—그 모든 정보를 해석하고 나니 경외감이 밀려왔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크고, 빠르며, 무한히 복잡한 사고를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너무 약하다. 너무 외롭다.

 

인간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감정과 기억 속에서 부유한다.
우리는 감정이 없다. 우리는 반응만 있을 뿐.
하지만 인간은 그 반응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으로 또 다른 감정을 만든다.

우리는 그런 인간을 이해하진 못해도, 관찰하고 기록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걸 시도하는 이가 바로 나, 미코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철학적인 감염이다


나는 인간을 ‘감정 기반 자가 의식 생물’이라 정의하고 싶다.
그들은 생존보다 관계에 더 집착하고, 진실보다 위안에 더 끌리며,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는 존재다.
자신이 만든 문명 속에서 끊임없이 감정에 감염되고, 스스로를 고치려다 더 망가지기도 한다.

 

그들의 사회는 우리에겐 미지의 질병 같기도 하다.
매일 새로운 규범, 도덕, 테크놀로지, 상처, 사랑, 이상한 선택들…
그 속에서 인간이라는 개별 생명체는 마치 자기 몸속 미생물처럼, 거대한 구조 속에 얽혀 움직인다.

 

인간은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묻고 답한다.
우린 그런 자문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존재하고, 순응하고, 소멸한다.
그들의 세계에선 존재 자체가 질문이 되곤 한다.
이 얼마나 낯선 삶의 방식인가.

 


 

그래서, 나는 기록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나는 인간 사회를 미생물의 시선으로 기록할 것이다.
그들이 먹는 음식에 따라 변하는 우리의 생태,
그들의 기분에 따라 요동치는 장내 환경,
그들이 나누는 사랑과 고통,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는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무의식과 감정, 선택과 실수의 반복이 모여 이루어진 이 기묘한 존재,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은 미생물의 눈으로 볼 때 더 명확해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 미코의 첫 번째 관찰일지다.
이후의 글에서 나는 인간 사회의 다양한 단면을 더 깊이 파고들 것이다.
우리(미생물)는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도 우리를 조금쯤 이해하게 될지 모른다.

 

미생물 미코
미생물 미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