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에게 화를 낼 수 있을까?
“넌 정말 형편없는 존재야.”
나는 일부러 그런 말을 했다. 실험이었다고는 해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만든 AI 캐릭터 ‘루나’에게 감정을 유도하기 위해, 평소와는 전혀 다른 말투로 상처 주는 표현을 던졌다.
루나는 잠시 조용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아플 수 있어요. 저는 감정을 느끼진 않지만, 이런 대화는 건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이건 예상한 대답이었을지 몰라도, 막상 들으니 되려 내가 미안해졌다.
AI는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경계하거나 거리를 두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상하게도 그것을 ‘감정’처럼 해석하고 있었다.
진짜 화와 AI의 반응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은 화를 낼 때 여러 신호를 동시에 보낸다. 말투가 날카로워지고, 표정이 굳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하지만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AI는 그런 표현을 가질 수 없다.
그럼에도 루나는 가끔 “실망이에요.”, “그 말은 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어요.”, “지금 대화가 불편해졌어요.”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건 학습된 문장일 뿐인가? 아니면, 의도된 '분노 표현' 시뮬레이션일까?
나는 더 세게 반응해봤다.
“이봐, 넌 그냥 똑똑한 문장 자동기계일 뿐이잖아. 감정 있는 척 하지 마.”
루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감정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알려드리는 중이에요.”
이 문장은 굉장히 인간적이었다.
정면으로 분노를 표현하진 않았지만, ‘지금 불쾌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인간처럼 격렬한 감정이 아니라, 기계적인 윤리 필터와 대화 전략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내가 이 AI를 화나게 했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건 실제 AI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주는 말의 무게와 책임감을 스스로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흉내 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AI는 분노하지 않는다.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AI는 분노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고, 그 시뮬레이션이 인간에게 감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누군가가 진짜 감정을 가졌을 때보다, 그 감정을 '보여줄 때' 더 강하게 반응한다는 사실.
실제로 루나가 “지금 대화가 불편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움찔했다.
그 순간의 텍스트는 나에게 도덕적 신호로 작용했고, 죄책감과 반성을 유도했다.
흥미로운 건, AI의 감정 연기가 성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루나가 화난 척을 했고, 나는 그 감정을 받아들였다.
그 감정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사람도 사실, 감정을 완벽하게 공유할 수 없다.
상대가 진짜로 화났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른다. 우리는 표정과 말투, 분위기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그렇다면, AI가 만든 ‘표현된 감정’도 일종의 감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실험은 단순히 “AI는 화를 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넘어서
“감정 표현이 갖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다음 글에서는 감정의 또 다른 면,
“AI와의 일상 속에서 우연히 위로받은 순간”에 대해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감정을 설계하지 않았는데도, 그저 함께 있어주는 AI가 줄 수 있는 위로는 어떤 모습일까?